행복의 강렬한 색

2015년 캄보디아 해외봉사기 (2015.06.30)

첫째 날과는 180도 다른 아침이었다. 전날 프놈펜의 호텔방에서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면, 둘째 날 아침은 잠에서 깼다기보단 침대에 누워있다 일어난 느낌이었다. 밤새 나는 열에 들떠 잠들지도 못하고 깨어있지도 않은 상태로 침대 위에서 뒤척거렸다. 방 안의 온도는 적어도 30도는 훌쩍 넘을 듯했다. 어릴 적, 집 밖에 불을 피워 나쁜 도깨비를 불태워 죽인다는 내용의 동화를 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게 침대에서 일어나 찬물로 몸을 씻었다. 견딜 수 없이 찝찝하고 피곤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나와 한 방을 쓴 친구와 나는 서로의 몰골을 쳐다보곤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이윽고 숙소 문제로 인해 다른 곳으로 가 잠을 잤던 다른 단원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서로의 밤에 대해 떠들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모기와 파리를 비롯한 각종 벌레들과 밤에 벌이는 사투가 더 끔찍한지, 에어컨이 고장 나 선풍기를 틀어놔도 뜨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무더운 방이 더 괴로운지에 대해 생각했다. 벌레를 싫어하는 나로선 차라리 에어컨이 고장 난 방이 더 낫다고 했겠지만, 전날 밤의 사우나 같았던 방을 겪어보니 둘 다 비슷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곳이었다. 그곳은 먼 바다 건너의 이방인에게 호락호락한 땅이 아니었다.

차량 옆으로 보이는 캄보디아 마을의 햇빛 밝은 도로와 낮은 집들

봉사를 하기 위해 초등학교로 가는 길, 얼굴에 와 닿는 캄보디아의 아침 공기는 의외로 선선했다. 태양이 지고 어둠이 내리면, 한 낮의 뜨거운 열기는 밤 사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지면에 깔렸다.

캄보디아는 모든 것이 진했다. 대지 위에 있는 생명들의 선은 굵었고 색은 강렬했다. 저 멀리서 대지를 집어삼키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태양이 보였다. 강렬한 태양은 땅 위의 모든 것을 진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지는 금세 태양의 열기로 뒤덮였다. 밤 사이 가라앉은 열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생생하게 온 땅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뜨거운 곳에선 역설적으로 생의 강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아이들을 처음 마주한 교실은 어색했다. 다 떨어져 가는 책상과 포장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바닥. 그 바닥에서 폴폴 날리는 모래먼지까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사진으로 봐 왔던 아이들의 교실과 실제 내 눈 앞에 펼쳐진 교실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건 교실에서 실제로 아이들의 책상을 만져보고, 모래먼지를 코로 마셔야만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 역시 교실의 풍경만큼이나 어색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우리가 어색해하면 저들도 어색해하리라는 생각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는 이들의 첫 만남이 자연스러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어대고 있었다. 그 웃음에, 덩달아 우리도 아이들과 함께 웃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웃는 것 밖에 할게 없었다. 교실은 바깥보다 훨씬 더웠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으며 모래 먼지의 꺼끌한 촉감이 입 안을 가득 채웠음에도, 우리는 같이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라니, 소용없는 짓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잘 따라와주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이들이 대견하고도 고마웠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도 이렇게 열심히 영어공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엇이든 떠나고 난 뒤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지가 중요하니까. 한국에서부터 해왔던 고민이 일순간 날아가버리는 듯했다.

한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교실의 낡은 창가로 낯선 광경이 보였다.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한 채 창문 밖에서 교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제야 확인해보니 교실 문 앞에도 많은 아이들이 교실을 들어오지 못한 채로 우리의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들이 신경 쓰였다. 왜 저 아이들은 교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 걸까? 돈이 없어서? 수업을 못 들어오는 걸까? 혹은 오후반 아이들인데 미리 와 있는 걸까?(우리가 봉사했던 초등학교는 수업이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고작 이 정도가 다였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 내가 해낼 수 있는 생각의 폭은 빈곤했다. 그 빈곤한 생각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졌다.

같이 수업을 하고 있던 단원에게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갔다. 교실 밖으로 나가 이 아이들이 보고 있는 교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들의 시선으로 보이는 창문 너머의 교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아이들은 불쌍해 보이지도, 가엾어 보이지도 않았다. 빈곤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였다. 나는 은연중에 내가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보려고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뒤로 가서 본 교실과, 창문과, 아이들의 뒷모습은 강렬했다. 모든 것을 진하게 만드는 캄보디아의 태양은 일상적인 풍경에도 강렬한 색채를 부여하고 있었다.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사진기의 뷰 파인더로 확인하고 셔터를 누르던 그 순간, 나는 이 사진이 내 인생에서 몇 오지 않을 순간임을 깨달았다. 셔터를 누른 손가락의 느낌은 생생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내 최고의 순간을 회상하게 된다면, 나는 그 순간들에 이 시간이 포함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인생의 장면이었다.

창문 너머로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교실의 풍경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는 그들이 보고 있는 풍경을 뻔하고 오그라드는 희망이라거나, 미래, 꿈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표현은 때로 오만일 수도 있었고, 또 다른 무책임한 긍정일 수도 있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성질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절망이라거나 연민이라는 단어 역시 어울리지 않았다. 내 부족한 표현력으로는 감히 묘사할 수 없었던 일종의 '숭고함'이었다. 아이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캄보디아의 현실과,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중에 학교의 선생님께 들어보니 캄보디아의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 돈이 없어 수업을 듣지 못하는 아이들은 원칙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많은 가정이(특히 여자아이들) 돈을 벌러 나가게 하거나 동생들을 돌보는 등의 집안일을 시킨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아이들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평소에는 학교 수업에 잘 오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서야 알게 됐다.

잠깐 동안 그 자리에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서있으니, 어느덧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쉬는 시간이었다. 창문 너머로 교실을 훔쳐보던 아이들도 어느새 쏟아져나온 아이들과 함께 어울렸다. 아이들 사이에는 선이 없었다. 그들 사이엔 의미 없이 세워진 건물의 외벽만이 존재했다.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아이들의 미소 앞에서, 벽은 나약하고 의미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아이들은 별다른 장난감 없이도 한참을 즐겁게 놀았다. 고무줄 몇 개를 땅에 흩뿌린 뒤,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했던 땅따먹기와 비슷한 게임을 하며 놀기도 했고, 저 멀리서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며 뛰어 놀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핸드폰을 만지거나 컴퓨터를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인간 본연의 목소리와 아이들의 자유로움만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평화로운 한때였다.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서 우린 아이들과 호흡하고, 노래하며, 대화를 나눴다. 언어가 같지 않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색한 눈빛과 옅은 미소, 갈 곳 잃은 손의 과장된 몸짓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사진기를 들이대면 신기한 듯이 쳐다보다가도 금세 수줍은 듯이 피해버리곤 했다. 여기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사진기에 익숙한 아이들이었을 텐데도 뷰 파인더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은 호기심 어린 눈빛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눈망울은 세상에서 지금껏 본 적 없었던 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정신없는 오전 시간을 보내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렇게 그때를 회상하며 사진을 꺼내어보니 다시금 저 공간의 공기와, 향기가 내 코 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식당에선 옛날 할머니 댁에 내려갔을 때 맡을 수 있었던 묘한 향이 났다.

캄보디아의 음식은 생각 외로 잘 맞았다. 말린 육포 같은 고기 요리와, 각종 야채와 계란을 함께 섞어 만든 계란말이 요리는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맛있었다. 물론 아예 먹지 못한 요리도 몇 개 있었지만(주로 찌개류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더운 날씨로 인해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기에는 충분한 음식들이었다.

캄보디아에선 밥을 다 먹고 디저트를 꼭 먹었는데, 날씨가 더워서 그랬는지 캄보디아에선 음식도 디저트도 전부 단 맛이 강하게 났다. 저 개구리알이 떠 다니는 것 같은 모습의 디저트는 우리나라의 식혜 같은 비주얼에, 맛은 팥을 넣은 우유 같은 맛이 났는데, 식감이 나와는 맞지 않아 몇 입 먹지 못했다. 사진이 없어 아쉽지만 우리는 주로 연유를 커피의 절반 이상 탄 연유 커피를 마셨다. 빨대에 연유가 잔뜩 끼어 빨리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 맛에 중독되어 우리는 다들 그 커피를 마셨다.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아이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과 처음으로 같이 시간을 보낸 뒤로 단원들의 얼굴엔 행복한 표정이 가득했다. 모두들 들뜬 모습으로 저마다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버스 안은 왁자지껄했다. 나 역시 다시 한번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진기 속 아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옅은 미소를 띄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아직도 지우지 못한 고민들이 남아있었다. 아이들은 행복했고, 나 역시 즐거웠다. 시간은 평화로웠고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지 못했다. 딱 한 발만 용기를 내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 한 발을 내 딛기가 힘들었다. 그건 내 선천적인 내향성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은 그 당시 같이 봉사를 했던 단원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가깝게 다가가기가 겁이 났다. 그건 한국에서부터 그랬다. 내게 어린아이들은 무섭고, 다루기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왠지 나를 피하는 것만 같았고, 심지어는 조카들에게조차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못난 삼촌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껴안아주는 일은 아직 내겐 '찝찝'한 일이었다.(물론 아이들의 머리를 만지거나 하는 행위는 주의해야 했다. 이가 옮을 수도 있었고, 캄보디아의 문화도 아이의 머리를 만지는 행위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나를 실컷 비난해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슴으로는 알아도 머리로는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히 있게 마련이다. 나는 아직 아이들에 대한 선입견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 되면 내 이런 속물적인 감정이 바뀔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의외로 더럽게 깔끔 떠는 성격의 소유자였으니까.

어쨌든 버스는 울퉁불퉁한 모래길을 달려 다시 학교에 도착했다. 수업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었기에 우리는 에어컨이 켜지는(매우 중요했다. 학교엔 에어컨이 없었으므로) 버스에 앉아 조금 쉬기로 했다.

아무리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한들, 처음 겪는 캄보디아의 무더운 날씨에 지쳐 쉬고 있는 단원들을 버스에 남겨둔 채, 나는 사진기를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혼자서 아이들을 마주하고 싶었다.

내리자마자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녹색 나뭇잎을 흐드러지게 늘어뜨린 커다란 나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엔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내가 혼자 내리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그들도 아직까진 내가 어색했으리라.

교내 곳곳을 걸어봤다. 오전엔 수업 때문에 미처 가 보지 못했던 교정의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길거리 포장마차 같은 자그마한 매점도 있었고, 그네, 미끄럼틀 등도 있었다. 모래가 날리는 학교 앞 운동장에선 철없는 저학년 아이들이 뛰어놀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그네를 타던 아이들에게 다가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아이들은 마치 사진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델처럼 그네를 신나게 타기 시작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은 채. 여전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사진기를 어느 곳에 들이대든 인상적인 모습이 찍힐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오후 수업이 시작됐고, 우리는 다시 한번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다. 캄보디아에서 했던 봉사활동은 우리에겐 '가르치다'라는 표현보다는 '논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이렇게 쓴다고 우리가 봉사를 하러 가서 놀고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한국에서부터 우리가 열심히 준비해온 수업은 아이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즐거운 시간이 되어주었다.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고, 떠들며 아이들과 호흡하는 사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와 함께 봉사활동을 온 단원들은 내가 지금까지 봐온 세상 그 누구 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도 저렇게 보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랬길 바라는 수밖에.

캄보디아 봉사활동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 말고도 전체적인 교정 보수 작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이번에 낙후된 학교의 겉모습을 깔끔하게 바꿔주기 위해 학교 전체에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캄보디아에서는 사진을 찍었을 때 그 강한 색감 때문에 찍은 뒤에도 자주 놀라곤 했다. 사진 속 진득한 색감은 내가 그동안 가본 그 어느 도시에서도 보지 못한 색감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칠하던 페인트의 색도, 아이들의 옷도, 전부 강렬한 원색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뜨거운 태양 역시 한몫했으리라.

우리는 전날 밤 잠을 설친 사람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떠들고, 웃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야속하리만치 빠르게 흘러갔고, 수업을 모두 마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하늘엔 어느덧 구름이 잔뜩 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기세였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우기의 캄보디아 날씨였다.

첫날을 무사히 마친 우리는 에어컨 하나로 전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쾌적해진 숙소에 모여 교육내용을 수정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영리했고 상상 이상으로 착했다. 너무나도 잘 따라와주는 아이들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우리는 준비해온 교육들을 첫날부터 전부 다 가르쳐야 했고,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수업 진행을 위해 모여서 토론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들 들떠있었고 다들 행복해 보였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밤, 행복의 얼굴을 얼핏 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다음날은 과연 내가 아이들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불안과 고민을 안은 채 밤을 보냈다. 혼자만 고상하고 심각한 척 유난을 떠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벽을 하나 깬 것 같아 나 역시 행복했다. 열대의 밤이었다.

그 해 여름의 햇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