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정해진 날, 특정 나이가 된 사람들은 사라진다
게임《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리뷰
1.
“다른 사람에게 꽃을 주려면… 시들어 죽기 전에 주는 게 좋을 거예요.”
“꽃이? 아니면 소피가?”
게임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Clair Obscur: Expedition 33)는 이처럼 아름답지만 불길한 농담으로 시작한다.
뤼미에르(Lumière)에서는 매해 정해진 날, 특정 나이가 된 사람들이 꽃잎과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완전히 소멸되는 고마주(Gommage)라 불리는 현상. 사람들은 저 멀리 바다 건너 거석에 새겨진 숫자를 통해 자신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있다. 그 숫자를 적는 이는 페인트리스(Paintress)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여인이다.
100에서 시작한 숫자는 해마다 하나씩 줄어 어느덧 34까지 내려왔으며, 게임이 시작되면 그 숫자는 33으로 바뀐다. 그리고 서른셋을 넘긴 사람들은 꽃잎이 되어 사라진다
죽을 나이를 미리 받아든 채 살아가는 삶.
《클레르 옵스퀴르: 33 원정대》는 이 암울하면서도 독특한 설정 위에서 출발한다. 게임 속 인류는 세계에 닥친 원인 모를 균열 이후 시작된 이 잔혹한 저주를 끝내기 위해 매년 원정대를 꾸려 페인트리스가 있는 거석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 어떤 원정대도 진실을 알아내기는커녕,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매년 원정대를 보낸다. 플레이어는 그 원정대의 일원, 서른두 살들로 구성된 ‘33 원정대’의 멤버가 되어 여정에 오른다.

2.
프랑스의 소규모 개발사 샌드폴 인터랙티브(Sandfall Interactive)가 만든 이 게임은, 턴제 롤플레잉 게임(RPG)이라는 고전적인 시스템 위에 실시간 회피와 패링(parrying)을 결합해 전투의 긴장감을 끌어올린 독특한 게임 시스템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게임을 향한 게이머들의 찬사는 비단 전투 시스템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술성에 대한 프랑스 특유의 집착에 가까운 요소가 곳곳에 자리 잡은 이 게임의 수려한 미술과 연출 요소, 감정을 끌어올리는 음악과 후반부에 이르러 완전히 뒤바뀌는 인상적인 반전의 스토리까지. 《클레르 옵스퀴르》는 게임을 이루는 거의 모든 요소가 완벽에 가깝게 맞물리며 그야말로 “왜 게임을 종합 예술이라고 하는가?”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은 작품이다.
이러한 완성도 덕분에 더 게임 어워드(The Game Awards)에서 올해의 게임(Game of the Year)을 포함해 9개 부문을 수상하며 그해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수상과 그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그 색이 조금 바래진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왜 이 게임이 많은 사람에게 “게임도 종합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다시 떠올리게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이 아래부턴 게임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
원정대는 마침내 거석에 도착해 페인트리스와 마주하고, 그녀를 쓰러뜨린다. 한 가지 이상했던 점은 페인트리스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원정대원들을 치유하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 아무튼 페인트리스를 쓰러뜨린 원정대는 뤼미에르로 돌아오고, 사람들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승리를 맞이한다.
그런데 그 순간, 세상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한다.
플레이어는 이때부터 게임의 이야기가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임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잠시 후 꽃잎이 되어 사라졌던 마엘이 어느 저택의 침대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마엘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건강하고 쾌활한 소녀가 아니다. 화상으로 망가진 얼굴, 잃어버린 한쪽 눈, 더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소녀. 알리시아(Alicia). 그것이 현실 속 마엘의 진짜 이름이다.
이때부터 게임의 세계는 완전히 뒤집힌다.
지금까지 플레이어가 현실이라고 믿었던 뤼미에르는 사실 캔버스(Canvas) 안에 그려진 세계였으며, 현실에는 그림 속 세계를 창조하고 그 안팎을 오갈 수 있는 데상드르(Dessendre)라는 신비한 화가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더 것. 이 데상드르 가문은 대립 세력인 ‘작가’의 습격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다. 그 화재 속에서 알리시아의 오빠 베르소(Verso)는 동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플레이어가 여정 중 만났던 베르소는 현실의 베르소가 아니라, 캔버스 안에 그려진 존재였던 셈이다.
또한 사람들을 지우는 악역처럼 보였던 페인트리스는 사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 알린(Aline)이었고, 그녀는 베르소가 남긴 캔버스 속 세계를 떠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고마주는 페인트리스가 벌이는 학살이 아니었다. 오히려 르누아르(Renoir)가 사랑하는 아내 알린을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 캔버스 속 세계를 지우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으며 페인트리스, 즉 알린은 오히려 캔버스 속 존재들을 보호하며 그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알리기 위해 거석의 숫자를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엔딩에 다다르면 플레이어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마엘의 입장이 되어, 감옥 같은 현실의 육신에 갇힌 채 살아가는 대신 사랑하는 동료들과 가족이 있고 건강한 몸도 있는 캔버스 속 세상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베르소의 편에 서서, 현실이 비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알리시아가 그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가게 할 것인가. 그리고 가상의 존재인 베르소 자신은 영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베르소의 편에 서서 현실이 비참하고 힘들더라도 그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가게끔 돕고, 가상의 인물인 본인은 이제 영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가.
어느 쪽도 완전한 행복은 아니다.
한쪽은 현실을 외면한 채 아름다운 허구 속에 머문다.
다른 한쪽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인 채 살아가야 한다.

4.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고 말했다. 그 유명한 실존주의의 대표격인 이 문장은, 인간에게는 미리 정해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내리는 선택과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클레르 옵스퀴르》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실존주의의 거대한 비유처럼 읽힌다.
게임 속 원정대원들은 살아 돌아올 보장 없이 길을 떠난다. 그들에게는 승리의 보장도, 귀환의 보장도 없다. 이전 원정대들이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들의 선택을 더 부조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은 떠난다. 떠나는 행위 자체가 그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선택 역시 마찬가지다. 마엘의 엔딩은 겉으로 보기에는 더 행복해 보인다.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시 곁에 있고, 망가진 몸과 가족의 비극도 더는 눈앞에 없다. 그러나 그 행복은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린 채 얻은 행복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기기만, 즉 고통스러운 자유와 책임을 피하려는 태도에 가깝다.
반대로 베르소의 선택은 잔인하다. 캔버스 속 세계를 끝내고, 알리시아를 상처 입은 몸과 무너진 가족이 기다리는 현실로 돌려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이 선택은 실존주의적인 태도에 가까워진다.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행복한 세계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내가 피하고 싶은 진실까지 포함해 “이것이 내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선택이 옳은지가 아니다.
나는 무엇을 외면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선택을 통해 나 자신이 되는가.
이 게임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에 가깝다.
실존주의적인 해석과 별개로 이 게임은 그 자체로 예술에 대한 이야기처럼도 읽힌다. 예술가는 자기 손으로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세계를 파괴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캔버스 속 세계는 누군가의 사랑에서 태어났지만, 그 사랑이 지나치게 오래 붙들릴 때 누군가에게는 감옥이 된다.
마엘의 엔딩은 그런 점에서 공허하고 조금은 기괴하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잃어버린 가족이 있고,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는 건강한 몸도 있다. 분명 행복한 삶이다. 그러나 그 세계가 진실한 세계는 아니다. 마치 《완다비전》(WandaVision)이 그랬듯,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아름다운 허구로 덮어버릴 때, 그 세계는 위로인 동시에 감옥이 된다.

5.
내게 좋은 게임, 더 넓게는 잘 만들어진 대중문화 콘텐츠란 단순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은 물론이고, 끝난 뒤에도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 여기에 더해 그 생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긴 여운으로 이어지는 작품.
그런 기준에서 내게 《클레르 옵스퀴르》는 단순히 잘 만든 RPG를 넘어, 죽음과 상실, 환상과 현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끝까지 묻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었다. 전투도, 미술도, 음악도, 이야기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게임이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는 점이다.
“나는 어떤 현실을 외면하고 있으며,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
6.
알아두면 더 재밌는 게임 속 프랑스어와 이에 대한 유래.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게임 속 단어들이 어디서 왔는지 비교적 쉽게 눈에 들어왔다. 《클레르 옵스퀴르》에는 미술과 프랑스어에서 가져온 고유명사들이 꽤 많다.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클레르 옵스퀴르(Clair Obscur)는 프랑스어로 ‘밝음과 어둠’, 또는 ‘명암의 대비’를 뜻한다. 미술 용어로는 이탈리아어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입체감과 깊이,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가리킨다. 카라바조(Caravaggio)나 렘브란트(Rembrandt)의 회화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고마주(Gommage)는 프랑스어 동사 고메(gommer), 즉 ‘지우다’와 관련된 단어다. 일반적으로는 문질러 지우거나 벗겨내는 행위를 뜻한다. 고마주 자체는 “문질러 떼어내 지우기”를 뜻하며, 유화에서 물감을 문지르거나 굳은 물감을 긁어서 떼어내 제거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뤼미에르(Lumière)는 ‘빛’을 뜻한다. 게임의 도시 이름이 뤼미에르라는 점은 제목의 ‘밝음과 어둠’이라는 주제와도 맞물린다.
베르소(Verso)는 종이나 캔버스의 ‘뒷면’, 또는 책의 왼쪽 페이지를 뜻한다. 게임 속 베르소가 현실과 캔버스, 앞면과 뒷면 사이에 걸쳐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름에서부터 이미 이 이야기의 복선이 담겨 있다.
이처럼 《클레르 옵스퀴르》의 고유명사들은 단순히 그럴듯한 프랑스어를 가져다 붙인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주제와 미술적 세계관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알고 보면 이 게임의 용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림’, ‘빛’, ‘색’, ‘지움’, ‘뒷면’에 대해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오랜만에(?) 거의 처음으로 너무나도 프랑스스러운 요소가 가득해서 그걸 찾아보는 재미로도 가득했던 게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