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을 넘어 체험하는 공연
<슬립 노 모어> 서울 후기

1.
“It will have blood, they say; blood will have blood.”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3막 4장
《맥베스》의 한 구절이자 내가 공연 중 경험한 '원온원(1:1)' 에서 들었던 이 문장만큼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그 안에서 내가 본 모든 게 결국 이 서늘한 문장 하나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었다.
영국의 공연 제작사 펀치드렁크가 만든 이 작품은 이머시브 연극이라고 불린다. ‘이머시브’는 말 그대로 몰입형 극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대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관객은 객석에 앉아 공연을 일방적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안을 직접 오르내리며 공연을 체험하게 된다. 제작사의 설명처럼, 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어둡고 영화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관객 스스로 자신만의 여정을 설계하게 만든다.
때문에 《슬립 노 모어》에서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는 거의 사라진다. 관객은 보고, 만지고, 걷고, 쫓아가고, 때로는 길을 잃기도 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누구를 따라가는지, 어느 방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그 순간 내가 보는 것이 곧 나만의 공연이 된다. 같은 공연을 보고 나와도, 각자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2.
《슬립 노 모어》는 입장 경험부터 인상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휴대폰, 스마트워치와 같은 전자기기와 소지품을 모두 맡기고 나면, 관객은 어두운 복도를 따라 들어가게 된다. “왼쪽 벽에 손을 대고 가주세요”라는 안내를 따라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공간을 한참 걸어가면, 마치 현실 세계에서 《슬립 노 모어》의 무대 속으로 건너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복도가 단순한 이동 동선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의 경계선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둠 끝에 도착하는 곳은 1930년대 어느 재즈바 같은 공간이다. “어젯밤 나는 다시 맨덜리에 가는 꿈을 꾸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 첫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멘덜리 바.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입장할 때 받은 카드가 호명된다. 호명된 사람들은 안으로 들어가 공연 유의사항과 감상법을 듣고, 기묘하게 생긴 회색 가면을 받는다.
이 가면은 배우와 관객을 구분 짓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관객의 익명성을 만들어내는 이 공연의 핵심 장치 중 하나다. 가면을 쓴 관객들은 침묵한 채, 배우들을 뒤쫓는다. 배우들은 가면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가끔 가면을 쓴 관객들이 배우를 빙 둘러싸고 바라보는 장면을 지켜보면, 그들이 마치 이 세계를 떠도는 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객은 존재하지만 개입하지 못하고, 목격하지만 바꿀 수는 없다.

3.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공간의 밀도다. 누군가의 집처럼 꾸며진 방, 숲, 병원, 큰 연회장, 상점가, 탐정 사무실, 박제상, 아이 방, 오두막 등이 하나하나 정교하게 꾸며져 있고, 소품 하나하나가 허투루 놓여있지 않다. 이 공간에서 서랍을 열어보고, 책상 위의 물건을 들여다보고, 벽에 적힌 글씨를 읽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놀라운 점은, 이 공간들이 단순한 세트가 아니라 전부 무대라는 사실이다. 관객은 이미 무대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관객은 흡사 오픈월드 게임처럼 허락된 범위 내에 있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 특정 배우를 따라가도 되고, 아무도 없는 방을 혼자 탐색해도 된다. 어떤 인물을 끝까지 쫓아가면 그 인물의 루트를 보게 되고, 중간에 다른 인물로 갈아타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보게된다.
공연은 약 한 시간 단위의 이야기가 반복되는(팬들은 이를 ‘루프’라고 부른다)구조로 되어있는데, 사건이 반복되더라도 관객의 시선과 위치는 계속 바뀌기 때문에 루프가 반복되더라도 늘 새롭게 느껴지게 된다. 즉, 내가 지금 이 방에서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 동안, 다른 층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다.
여기가 이 공연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 중의 하나이기도 한데, 불친절한 서사 구조로 인해 이야기가 명료하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맥베스》를 조금이라도 알고 가면 이 파편화된 장면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맞출 수 있다.

4.
맥베스의 스토리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맥베스라는 장군이 세 마녀로부터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아내인 레이디 맥베스는 그 예언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그를 부추긴다. 결국 맥베스는 덩컨 왕을 죽이고 왕이 된다.
하지만 권력을 얻었다고 평온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불안에 사로잡힌다. 마녀들이 또 다른 예언으로 친구 뱅코의 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뱅코를 죽이지만, 그의 아들까지 죽이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 뒤로 맥베스는 점점 더 많은 피를 부르고, 점점 더 깊은 파멸로 들어간다.
나는 이번이 두 번째 관람이었는데, 예전 뉴욕 여행에서 관람했을 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심지어 맥베스를 원전으로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기보다는 무대 디테일을 보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을 썼다.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꼭대기 층의 병원도 가보고, 상점가의 소품들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거의 공간 탐험을 하듯이 관람했고, 당시 그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압도적이어서 그 이후로는 늘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경험 중에 하나로 말하곤 했다.
뉴욕에서의 첫 관람에서 공간을 탐험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면, 이번 서울 공연에서는 스토리의 흐름을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초반에는 주인공 맥베스를 따라가며 큰 줄기를 잡았고, 중반부터는 인파를 피해 간호사(Nurse Shaw & Matron)들의 동선을 선택했다.

5.
이 선택은 개인적으로 '신의 한 수'였다. 주인공 맥베스는 구름 관중을 양떼처럼 몰고 다녔고, 어떤 장면은 제대로 관람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반면 간호사 루트는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어느 순간에는 거의 나 혼자 배우를 따라다니기도 했는데, 그 덕분에 이른바 ‘간택’이라 불리는 원온원(1:1)을 경험할 수 있었다.
원온원이란 배우가 관객 한 명의 손을 잡고 둘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데려가, 오직 그 관객만을 위한 연기를 펼치는 것을 말한다.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게 그렇게 특별한가?” 싶었지만, 직접 겪어보니 왜 사람들이 그토록 원온원에 열광하는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Matron과의 원온원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Nurse Shaw를 지켜보다 다시 Matron 쪽으로 돌아온 순간, 그녀가 앞선 사람들을 제치고 내게 다가와 손을 내민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간택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홀린 듯 그 손을 덥석 잡았고, 그대로 오두막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안에서 Matron은 내 가면을 벗겨 한편에 놓아두고 연기를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낯선 긴장감에 거의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앉히더니 무릎 위에 손수건을 얹고 찻잔을 건넸다. 홍차를 따라 숟가락으로 몇 번 먹여주더니, 이내 차를 흘린 내 입가를 세심히 닦아주었다. 다정하면서도 어딘지 섬뜩한 면도 있었는데, 바로 이어서 그녀는 한 아이가 등장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Woyzeck》의 “Grandmother’s black fairy tale”. 그리고 갑자기 암전이 되더니, 그녀는 내 손을 잡아끌고 팔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뒤, 귓속말을 반복했다.
“피는 피를 부른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날의 Matron은 표혜인 배우님이었는데, 나와 눈을 마주하며 가면을 벗겨내고, 대사를 읊조리던 그 순간의 흡입력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아, 진짜 도파민은 원온원인 것이었다…
가면을 쓴 수많은 유령들 중에서 배우가 나를 골라 손을 내미는 순간, 공연은 “모두의 것”에서 “나만의 것”이 된다. 내가 이 세계를 단순히 보고 있는 걸 넘어서서, 그 세계 속으로 더 강렬하게 들어가보는 경험. 그 경험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종류의 전율이었다.

6.
물론 원온원을 하지 않더라도, 배우들의 눈, 근육의 움직임, 숨, 땀, 시선까지 모든 것을 아주 근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공연은 충분히 특별하다. 일반적인 공연에서는 멀리 있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여기서는 바로 코앞에서 벌어진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누군가 미쳐가고, 누군가를 죽이고, 유혹하며 무너진다. 관객은 지근거리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바라보며 불편함과 매혹을 동시에 느낀다. 무언극으로 진행되는 내내 온몸을 언어 삼아 표현하는 배우들의 우아함 역시 그 자체로 경이로운 장면이다.
성인 전용 공연인 만큼 잔인하거나 배우가 전신 나체로 연기하는 파격적인 장면들도 등장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아주 가까이서 마주하는 순간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그것이 결코 외설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자극적인 요소들은 이 거대한 세계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 공연을 접했을 때 ‘내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나?’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던 건, 그만큼 《슬립 노 모어》가 독보적인 경험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티켓 가격이 20만 원에 육박한다는 점은 분명 부담스럽지만, 가만히 앉아 관람하는 여타 다른 공연들의 가격을 떠올려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하나의 완결된 세계관 속을 직접 탐험하며 나만의 독창적인 경험을 얻고 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아, 물론 진짜 저렴하다는게 아니라..).
물론 《슬립 노 모어》는 결코 친절한 공연이 아니다. 서사를 명확히 설명해주지 않으며, 관객은 결코 모든 장면을 다 볼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 점이 답답한 요소가 되겠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불완전함'이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내가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사이의 공백이 공연이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 여운처럼 멤돌며 내가 놓친 방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지, 다른 인물을 따라갔다면 무엇을 보았을지 끊임없이 되뇌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슬립 노 모어》는 공연을 ‘보는’ 행위를 넘어 공연을 ‘걷는’ 체험에 가깝다. 객석에 앉아 주어지는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파편화된 장면 사이를 직접 이동하며 나만의 서사를 스스로 조립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세계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것 같은 기분.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공연을 수차례 반복 관람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지금 슬립 노모어 예매창을 띄워놓고 계속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