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 덕후 내향인들 모여라~!
두서없이 풀어보는 2026 인벤타리오 후기

1.
뭔가를 아날로그 형태로 많이 쓰질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구는 내가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테마 중의 하나다. 오히려 공부를 열심히 하던 학생 시절엔 아무 펜으로나 공부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왜 문구류를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그래도 나름 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구류 앞에 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꼭 써야 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좋은 펜과 노트가 있어야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펜촉의 굵기를 비교하고, 잉크 색을 들여다보고, 종이의 질감을 만져보는 일에는 그 행위 만으로도 이미 좋은 글이 나올 것만 같다는 묘한 즐거움이 있다.
무엇보다 문구류에는 요즘 시대를 역행하는 아날로그 분야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더 빠르고, 더 가볍고, 더 효율적인 것들이 당연해진 시대에 굳이 종이를 고르고, 펜촉의 굵기를 비교하고, 잉크 색을 들여다보는 일은 어쩐지 조금 비효율적이지만,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더 마음이 가기도 한다. 어떤 마음은 종종 느리게 혹은 가만히 서서 시간을 들여 바라봐야만 보이기도 한다.
그런 내게 작년부터 개최된 인벤타리오라는 행사는 늘 설레는 행사 중의 하나다. 작년이 첫해였던 만큼 행사 운영에서 조금은 미숙한 면들이 보였다면, 올해의 관전 포인트는 그런 운영 미숙이 얼마나 해결됐을 것인가 하는 부분에도 자연스레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2.
첫 날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에 따르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발권부터 몰려 입장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해서 조금은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가 다녀온 목요일 오후 1시 즈음엔 꽤나 한산해서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특히 네이버가 최근 밀고 있는 페이스 페이를 사전에 등록한 사람은 패스트 트랙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입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이 발권에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황형과의 삼쏘에서 이해진이 굳이굳이 페이스 페이를 내세우더니 최근에 네이버가 이쪽에 꽤나 무게를 싣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해보니,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작년보다 압도적으로 커진 규모였다. 작년엔 2층에서도 일부 공간에서만 진행됐다면, 올해는 2층의 거의 전체를 넓게 사용하는 형태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아무래도 작년의 그 열기를 생각해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문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나…싶었다.
3.
문구류는 내 기준에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무드랄까, 컨셉으로 나뉘어진다. 한쪽은 귀엽고 키치하고 트렌디함을 내세우는 부류, 한 쪽은 무게감있고 진중하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부류. 내 취향은? 보나마나 후자다. 전자의 컨셉을 내세우는 브랜드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더라도 거의 스쳐 지나가듯이 구경만 할 뿐이었지만, 후자의 취향인 곳들은 줄을 서서 체험도 해보고, 한참을 구경하다가 결국 구매까지 이어졌다.
그 중에서도 파이롯트 부스는 직접 다양한 만년필 촉(ef, e, m촉)을 경험해보고, 다양한 색의 몸통을 조합해 조립해보는 경험을 제공해 인상적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이로시주쿠 잉크를 전부 어떤 색인지 써볼 수 있어서 내겐 꽤 유익한 부스였다. 아, 근데 사실 한국 파이롯트 대표님이신… 김진표형이 부스에 있어서 진짜 깜짝 놀라서 멀리서 보다가 체험해보게 되긴 했다. 긴가민가 했는데 목소리를 듣고 딱 알아봤다. 진표형… 진짜 일 열심히 하시는군요…
그 밖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알게되어 애정을 갖고 있는 썸무드 디자인이라든지, 이번에 새로 알게된 kawi라는 패턴지 브랜드, 까렌다쉬, 파버 카스텔, 로지텍(?) 등의 부스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어릴적 집에 다들 하나 씩은 있었을 샤파의 연필깎이나, 네이버 라운지에서 안내하시는 분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날개달린 모자 처럼, 나같은 늙은이들이 보고 반가워할만한 요소들도 재밌었다.





4.
물론 문제점들이 없었던 건 아닌데, 첫날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에서 익히 봐 왔던 포인트 오브 뷰의 키티 콜라보 같은, 정말정말 인기있는 부스들의 경우에는 애시당초 입장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입장 대기가 일찌감치 마감된 곳도 많았고, 대기 시간이 2시간이 넘어가는 곳들도 종종 있었다. 다만 깔끔하게 포기하면 맘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기에 내겐 큰 단점이 아니었지만.
또 다른 문제는, 플라츠 2 구역의 룸 형태 부스들의 온도가 너무 높았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좁은 공간이라 복도 형태로 이루어진 부스들보다 상대적으로 관람 동선도 안나오는 곳인데, 온도까지 높다보니 그 안의 불쾌도나 관람 경험은 그다지 유쾌하다고는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당연하게도 피로도가 쌓일 수 밖에 없었고. 물론 겁먹었던 것 만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여유롭게 볼 수 없었다는 건 작년에도 올해도 아쉬울 수 밖에 없는 포인트였다.

5.
내가 자발적으로 가는 페어는 서울 국제 도서전 아니면 인벤타리오 정도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독서도 문구도, 전부 꽤나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취미인 경우가 많은데, 늘 이런 행사들의 인기도는 하늘을 찌른다. 뿐만 아니라 두 가지 모두 북적거리고 정신없는 것과는 거리가 먼, 뭔가를 고르거나 구경하려면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천천히 살펴보고, 만져보고, 고르기도 하면서 즐겨야 하는데 이 두 가지 행사에서는 그런 일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에 도서전은 예매 자체가 어려웠다는 걸 보면, 또 얼마나 많이 몰릴까 싶다. 솔직히 난 매년 도서전에 점점 더 실망감이 커져 올해는 안 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냥 강 건너 불구경이긴 하지만. 내향형인 문구인과 도서인들 모두 일년에 몇 안되는 이런 사람 많은 행사에서 기빨려서 힘들어할 걸 생각하면 안쓰럽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에 대한 사랑 하나로 꾸역꾸역 와서 펜을 만져보고, 노트를 고르고, 책을 들춰보는 그런 모습 자체가 조금은 귀엽고 재밌게도 느껴지는 지점이긴 하다.
결국 나도 그중 한 명이지만.


